1
비, 빗소리, 창문, 그리고 이불. 모르는 사람의 웹사이트를 염탐한다. 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한다. 잠시 뒤척이다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다시 눈을 뜬다. 여전히 비, 빗소리, 창문, 그리고 바람. 아 이불이었나? 그다음 사람의 웹사이트를 염탐한다. 뭐야 이게. 그래 글을 써야지. 푸른 빛이 점점 밝아진다. 눅눅하다. 저번에 먹다 만 그 과자처럼. 아버지는 새벽에 일어나 그 과자를 한 움큼 입안으로 털어 넣고는 방으로 다시 들어가셨다.
비가 온다. 잠시 창문 밖을 내다보지만 내리는 비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냄새를 한번 맡아본다. 익숙한 새벽의 냄새가 코를 뚫고 밀려들어온다. 지금 몇 시지. 말을 하지 않은 지 벌써 5시간이 지났다. 갑자기 시력을 잃은 너의 이야기가 생각나 무서워 [아-] 하고 짧은 신음을 내본다. 음. 또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어 나는, 이불 속으로 들어간다. 아직 새벽에 과자를 먹을 용기는 없다.
그때 갑자기 전화가 온다. 정말, 이 새벽에. 핸드폰이 울리는 즉시 마음속 깊이 숨어있던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얼마 전부터 모르는 한 번호로 전화가 걸려온 탓에 신경이 많이 날카로워졌다. 그래도 전화를 받는다. 나는 말은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그녀는 내 이름을 한 번 더 부른다. 나는 화가 많이 난 상태다. 아니 적어도 그런 척을 해야만 한다. [너 지금 몇 신 줄 아니. 놀자. 지금 이 시간에 무슨 미친 소리야. 왜, 이젠 내가 싫니. 그땐 좋아하더니.] 그녀에겐 없던 말을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재주가 있다. 나는 화를 내며 종료 버튼을 여러 번 누른다. 사실 그럴 필요까진 없다.
전화를 끊고 보니 어느새 주변이 좀 더 환해져 있다. 아침이 오는 게 싫다. 새벽엔 책임질 일이 없어 좋은데. 나는 무언가 중요한 것을 놓친 기분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옷을 입고 어딘가로 향한다. 가는 길에 끊임없이 전화가 울린다. 전화를 받는다. [어디야? 나 잠깐 밖에. 너 우리 집 오는 거지? 아닌데. 오고 싶지? 아닌데.] 와 비슷한 쓸데없는 말을 주고받았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질 않았다. 이제 그런 건 더는 중요하지 않다.
그녀의 집까지 조금 더 걸었다. 전화는 오지 않았다. 전화는 오지 않았지만 그녀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마치 서로 뇌가 공유되는 것처럼. 이상한 경험이었다. [너 사실은 나를 원하고 있지? 다 알아. 그래서 오고 있는 거잖아. 너 진짜 이상하다. 너 소시오패스 같아. 너 사실 나 말고는 친구가 없지?] 나는 핸드폰을 꺼내 얼른 차단 버튼을 찾아 눌렀다. 하지만 그녀가 계속 떠오르는 걸 차단할 순 없었다. 그래서 차단 버튼을 여러 번 반복해서 눌렀다. [차단 (메시지 차단) - 메시지 차단, 프로필 비공개 - 차단해제 - 차단이 해제되었습니다. 지금 친구로 추가하시겠습니까? - 네 ... ]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그녀의 집 앞에 있었다. 누가 지켜보고 있을까 두려운 마음에 얼른 엘리베이터로 몸을 숨기고는 10층 버튼을 여러 차례 눌렀다. 급한 마음 탓인지 아니면 원래 그런 건지 몰라도 엘리베이터는 고요하고 또 느리게 움직였다. 밖으로 나오니 낮처럼 밝아져 있었다. 어쩌면 엘리베이터 안에서 몇 시간이 지난 걸지도 몰라. 나는 서둘러 그녀의 집 앞으로 가 초인종을 눌렀다. [띵-동. ... 띵-동. 띵-동.] 나는 답답한 마음에 벨을 여러 번 눌렀다. 사실 그럴 필요는 없는데. 잠시 후 어색한 목소리의 그녀가 대답했다. [누구세요. 누구시냐고요. 나야. 네? 누구신데요? 나라고. 아, 그러니까 누구시냐고요. 네? 아... 혹시 하나네 집 아닌가요? 아닌데요. 네? 아니라고요. 아, 그럴 리가 없는데요. 아침부터 남의 집에 장난이나 치고 당신 대체 뭐야? 아 죄송합니다.] 나는 다시 차단을 해제하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나를 차단했는지 전화를 받진 않았다. [...]
비, 빗소리, 창문, 그리고 이불. 뭐야 이게. 요즘 진짜 아무나 글 쓰네. 이 정도는 나도 쓰겠다. 나는 여러 사람의 웹사이트를 염탐한다. 혹시 흔적이라도 남길까 봐 개인 정보 보호 모드로 보는 것이 이젠 버릇이 됐다. 지금 몇 시지. 벌써 아침이 됐네. 2시쯤 일어나려나. 나는 잠이 들기 전 핸드폰을 켜고 차단 목록을 확인했다. 그중 하나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하나? 하나가 누구더라. 내가 이런 사람이랑 연락을 했었던가. 그때 갑자기 밖에서 과자 먹는 소리가 들려온다.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와그작.] 소리가 끝나갈 때쯤 눅눅해진 이불 속에 몸을 숨긴다.
2
[아, 저는 바닐라라떼로 할게요. 네. 아니요.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네, 감사합니다.] 하고 미리 맡아둔 자리에 앉았다. 커피를 즐겨 마시진 않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는 주로 커피를 시키는 편이다. 짙은, 또 가끔은 연한 갈색의 액체. 90년대를 선도한 저명한 기업가 스콧 샘슨이 예언했듯이 21세기의 인간은 다량의 물과 피, 그리고 커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건 방금 내가 지어낸 말이다. 와 같은 덧없는 망상이 끝나갈 때쯤 내 시야에 그녀가 들어왔다. [어, 오셨어요? 네, 안녕하세요. 오늘 진짜 덥네요. 주문하셨어요?] 대답을 하려고 할 때 주문한 바닐라라떼가 나왔다.
그녀는 잠시 후 한 손에 아이스티를 든 채로 나타났다. [아, 커피 원래 안 드신다고 하셨죠? 아, 아뇨 그건 아닌데 오늘은 이게 좋아서요. 근데 이 카페 진짜 분위기 좋네요.] 나는 눈동자를 한 바퀴 정도 굴리며 대답했다. [네, 정말 잘 고르신 거 같아요. 여기가 그렇게 유명하다면서요. 네, 친구가 좋다고 추천을 해주더라고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나는 이번엔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 제 친구들은 곧 도착한다고 하네요. 다행이네요.] 따위의 어색한 대화가 끝나갈 때쯤 내 친구들이 그녀의 일행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모임에서 대화를 주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할 능력이 없어서라기보단, 다른 사람 말을 들으며 중요한 순간에 할 말만 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내성적인 탓도 있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평소에 동경하던 사람들과의 만남이라 기대를 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저번 주부터 무슨 옷을 입으면 좋을지, 대화는 어떻게 이어가야 할지와 같은 사소한 것까지 고민했다. 따라서 오늘은 조금 다르다.
[그럼 이제 다른 계획도 있으세요? 네? 아 저는 그냥 계속 책을 만들려고요. 어떤 책이요?] 잠시 대답을 정리하는 중에 발언권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 저 대답은 내가 하고 싶었는데.
대화는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는데 그 점이 거슬려 어느 순간부턴 대화보다 그것을 찾는 데 더 집중을 하고 있었다. [저번에 나온 그 작업물 보셨어요? 어떤...] 아 의자가 지금 좀 불편한 건가? 나는 자세를 조금 고쳐 앉았다. [...그 책이 우울증에 관해서 정말 상세하게...] 자세를 바로했지만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요즘 지구온난화 때문에 난리인데 저희도...] 아! 온도 때문인가? 지금 내가 좀 덥나?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옆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게 조심히 겉옷을 하나 벗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새들도 우울증 탓에 거처를 옮기고... 심지어는 쥬라기시대의 큰 육식 공룡들도 우울증에 걸렸던...]
잠시 집중력을 잃은 동안 대화의 주제는 예상하지 못한 곳으로 흐르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하려고 만났던가? 아니 무슨 공룡이 우울증에 걸려? 나는 대화를 바로 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아 그래서 사실은 제가 이번에 사진 프로젝트를 할까 하는데요. 저도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데! 어떤 프로젝튼지 설명해주세요. 아 이게 뭐냐면 일단 일정 기간 동안 필름 사진을 찍고 다 찍은 롤을 랜덤하게 배분해서 각자 고른 사진에 대해 글을 쓰는 거예요. 와 재밌겠다. 근데 ... 않을까요?] 어느샌가 커진 음악 소리 탓에 듣지 못했다. [네? 아 아닌가? 아무튼 좋은 아이디어 같아요.] 나는 혹시 같이해볼 생각이 있냐고 묻고 싶었다. [그걸 듣고 생각났는데 있죠 ... 이번엔 그 공룡이 ... 와 정말요? ... 이게 세로토닌의 분해를 담당하는 효소를 ... 티라노사우루스는 일단 이빨의 두께 자체가 어마어마하게... 어 근데 그 제가 말한 사진 프로젝트는... 네? 아 잘 안 들려서요. 아 아니에요...]
아 이제 알겠다. 아까부터 찾던 바로 그것. 그건 바로 카페에서 울려 퍼지고 있던 음악 소리였다. 점점 커져가는 음악 소리 때문에 도통 말소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잠시 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를 포기한 사이에 이미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세계로 떠나버렸다.
[사실은 이번에 공룡 만화를 그려 보려고 하는데 저희 다 같이 참여해보면 어떨까 해서요. 좋아요! 정말요? 같이 해보실래요? 네? 같이 해보실래요? 뭐를요? 공룡 만화요. 그렇지만 저는 공룡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데요. 방금 제가 다 설명해드렸잖아요. 음악 소리가 너무 커서 못 들었어요. 그것보다 갑자기 웬 공룡인지 저는 이해가 안 가는데요.]
나는 바닐라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는 창밖을 내다봤다. 탁 트인 풍경에 아기자기한 집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역시 유명한 카페는 경치부터 다르네, 하고 생각하는 찰나 하늘에 둥둥 떠다니는 구름이 눈에 띄었다. 분명 저건 티라노사우루스다. 하얀 티라노사우루스는 조금은 고요한 발걸음으로 하늘 위를 뛰어다니고 있었다. [티라노사우루스라... 네? 아... 아니에요.]
그리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사람들이 모두 떠난 뒤였다.
3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오늘은 어디가 불편하신가요? 그게... 제가 아무리 노력해봐도 사랑이라는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아. 언제부터 그런 증상이 나타났죠? 음... 한 반 년정도 된 것 같아요. 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주시겠어요?] 손에 쥐고 있던 볼펜을 내려놓으며 그가 말했다. 동네의 다른 병원 의사와는 다르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고 나는 곧 이 병원의 단골이 되었다. 의사치곤 젊은 나이의 그는 마치 드라마 속의 주인공처럼 날카롭고 또 부드러운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말을 이어나가려는 순간, 책상 한구석에 놓여있는 그의 가족사진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선생님처럼 돈이 많으면 사랑이라는 감정을 더 확실하게 느낄 수 있나요? 그래서 결혼하신 건가요?] 라고 묻고 싶었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그는 다른 의사와는 다르게 차분한 자세로 기다리는 것이 특징이었다. [저도 한때는 사랑이 뭔지 안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더 자세하게 들을 준비가 되어있다는 표시를 보냈다. [제가 정말 좋아했어요. 그리고 그 사람도 저를 좋아했어요. 저희가 조금 멀리 떨어져 있었거든요. 새벽에 일어나서 그녀를 보러 가는 게 사랑이라고 믿었어요. 그때는 그랬어요.] 그의 눈동자는 미동도 하지 않고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 내가 지금껏 만난 다른 의사와는 다르게 차분하게 기다려주는 것이 그의 특징이었다. [날이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그녀를 먼저 생각했어요. 비가 올 때는 우산도 서로 들어줬고요. 그때는 그런 행동이 사랑이라고 굳게 믿었거든요. 선생님 그게 사랑인가요? 이제는 잘 모르겠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밥을 먹고 계산을 하거나 옷을 사주더라도 돈이 아깝지가 않았어요. 결국엔 평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고 믿었거든요. 그때는 그런 감정이 사랑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녀가 옆에 있든 없든, 미래를 상상할 때면 그녀가 옆에 있었어요. 적당한 크기의 집과 크림색 강아지 한 마리, 적당한 차, 그리고 적당한 수입이 있었어요. 옆집 이웃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가끔은 서로의 부모님께 적당한 금액의 용돈을 드리고 적당한 노후를 보내며 살고 있었어요. 선생님 그건 사랑인가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저도 사랑을 쉽게 정의 내릴 수 있는 사람은 아니랍니다. 하지만 그건 주훈 씨가,] 그는 다른 의사와는 다르게 내 이름을 외우고 있었다. 이건 아마도 꼼꼼한 그의 성격 덕일 테다.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선생님 그게 무슨 뜻이죠? 자세히 설명 좀 해주세요. 방금 말한 그대로예요. 그때 사랑이라고 믿었다면, 그건 아마도 사랑이었을 가능성이 커요. 선생님 그럼 이제부턴 어떡하죠? 저는 그렇게, 제가 느껴온 그 감정이 사랑이라고 믿었는데 지금은 잘 모르겠어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사랑은 분명 복합적인 감정이지만 쉽게 생각할 수록 쉬워지는 법이에요. 잠시 제 얘기를 말해드리자면,] 그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단어와 단어 사이에는 안정적인 리듬감이 느껴졌고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마치 클래식 음악을 듣는 기분이었다.
그가 벗은 안경을 내려놓는 동안 귓가에는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저는 오히려 주훈 씨와 다르게 사랑이 뭔지, 연애가 뭔지, 결혼이 뭔지 모르고 연애를 했어요. 장거리 연애를 한 탓에 위기도 많이 겪었고, 그럴 때마다 비행기를 타고 그녀를 만나러 가곤 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그런 게 사랑이었나 싶네요. 다시 돌아가면 그렇게는 못 할 거 같아요.]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말이죠, 사랑을 정의 내리는 건 불가능해요. 그 유능한 아인슈타인조차도 사랑을 중력에 비유하곤 했죠. 결국엔 설명할 수 없는 이끌림으로 설명해야만 하는 게 사랑인 거예요.] 그는 가족사진을 애틋한 눈으로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피아노 소리는 어느새 끝나고 잔잔한 재즈기타 소리가 흐르고 있다.
[자,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요. 주훈 씨, 너무 상심하지 마세요. 언젠가 중력보다도 강력한 이끌림을 느끼는 대상이 나타날 거예요. 그 기회를 놓치지 마세요. 약은 일주일 치 처방해드릴게요. 아침, 저녁으로 나눠 드시면 돼요. 선생님 근데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고 했는데... 그 약만 먹으면 심장이 너무 두근거리고 몸 밖으로 튀어나올 때도 있고 이리저리 늘어났다가 펑,하고 터지고 결국엔 잠이 들어요. 원래 그런 약인가요?]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자, 주훈 씨, 너무 걱정하지 마시고 다음 주에 다시 뵐게요.] 그는 내가 알던 다른 의사와는 다르게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선생님.]
하루 일과가 끝났다. 책상 위 서류 더미를 정리하며 이 동네는 왜 이렇게 이상한 놈들만 있는 거야? 하고 생각할 때, 띵동, 하고 메세지가 도착했다. [지금 병원 앞이야. 벌써? 응, 보고 싶어서. 아이, 그러다가 들킨다고 내가 말했잖아. 보고 싶어서 그러지. 얼른 갈게. 주차장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알겠어. 오늘 집에는 정말 안 들어가도 돼? 말했잖아. 괜찮아, 학술대회 일정 때문에 얼마간 바쁘다고 말해놨어.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
그는 차분하게 메세지를 보내며 휘파람을 불었다. 그리고는 가운을 벗고 옷을 입으며 창밖을 내다봤다. 어느새 어두워진 저녁 하늘 위에는 유난히 커 보이는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그는 왠지 그 달이 휘파람 소리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고 믿었다. 실은 오래전 멈춰 더는 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른 채.
4
나는 시계를 보지 않는다. 시간을 확인할 때면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든다고 언젠가 말했던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자리에 앉아 키보드를 만지작거린다. 그러다가 역시 글을 써야겠다고 다짐하며 시계를 보지 않기 위해 화면 오른쪽 하단을 가리고는 재빠르게 전원을 켠다. 내가 이 이른/늦은 아침/밤/새벽에 대체 뭘 하는 거지. 사실 이렇게 열심히 살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우연히 전화가 걸려와서 받았고 인터넷에 장난으로 올린 내 글을 읽고는 작가를 해보는 건 어떻겠냐는 말에 일주일에 하루 정도는 글을 쓰며 작가 행세를 해도 괜찮을 거 같아 시작한 일이 이제는 내 일주일, 아니 한 달을 갉아먹고 있었다. 임시보관함이라는 이상한 이름을 가진 이 단체는 아마 신인 작가를 모아 사업을 하는 단체 같은데 작가 모집 이외의 모든 연락은 전화가 아닌 이메일로 하며 점점 사람이 아니라 기계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심어주고 있었다. 게다가 다른 요일에 연재하는 작가1은 일주일에 총 4번을 연재하는데 내 기준으로는 새로운 이야깃거리가 매일 나온다는 것이 상상할 수조차 없는 일이라 그 의심을 더욱 키워주고 있었다. 작가1은 신인 작가는 아니고 문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을 들어봤을 만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내 첫 글을 읽어보고는 개인적으로 이메일을 보내 [아직 부족한 점이 많긴 한데 처음치고는 잘 쓰셨네요. 제가 처음 쓸 때는 말이죠...] 따위의 말을 늘어놓았다. 오래된 옛 친구에게서 온 편지를 읽는 느낌이라 불편하진 않았는데 나는 답장을 보낼까 말까 고민하다가 음. 보내지 않기로 했다. 그는 내 두 번째, 세 번째 글을 읽고서도 나름의 칭찬과 고칠 점을 요약해서 보내주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글을 체계적으로 구성하는 타입은 아니었고 더 솔직히 말하면 일주일에 한 번인데 뭘,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었는데 그는 어떻게든 칭찬할 점을 찾아 길고 또 깔끔하게 정리해주었다. 그의 메일 안에는 가끔 의도를 알기 힘든 말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이번에 쓰신 글은 조금 더 기승전결이 확연히 드러나는 글이네요. 이건 좋은 글이지만 저희랑은 맞지 않아요.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러면서 특별하고 특이한 글을 써주시면 작가님과 더 어울릴 수 있을 거 같네요.]와 같은 말이었다. 그 밖에도 [예전에 비슷한 결의 글을 쓰시는 작가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분도 처음에는 적응하기 힘들어하셨어요. 하지만 제 조언을 들으시고 조금 더 호불호가 갈리는, 명확한 글을 쓸 수 있게 되었답니다.] 라던가 [가끔은 글이 너무 긴 것도 같네요. 조금 더 줄이셨으면 좋겠어요. 한 문장이라던가 아니면 한 글자도 좋아요.] 와 같이 아리송한 감상문을 보내왔는데 나는 어떻게 글을 한 문장 또는 한 글자만으로 완성하라는 건지 전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임시보관함이라는 이름 탓인가. 하지만 내가 말했듯이 나는 이 단체에 소속감을 느낄 만큼 애정이 있다거나 책임감을 느끼며 글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쉽게 내 글을 이리저리 바꿀 수가 있었고 큰 무리 없이 한 글자만 적어 글을 마치고 보냈다. 독자의 반응이 어떨지는 모르겠다. 아니 이렇게 글을 써도 되는 건가? 괜히 나만 욕먹는 거 아냐? 평소에 글을 보내면 하루 이내에 작가1의 감상문을 받아볼 수 있었는데 이번엔 그 감상문조차 오지 않았다. [뭐야. 지가 한 글자로 써보라고 했으면서. 나 잘린 건가?] 라고 중얼거리는 사이 갑자기 [띵-동] 하고 벨이 울렸다. [누구세요? ...아 저.. 저는 예훈이라고....그 임시보관함.....] 갑자기 내 주소는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 모르겠지만 작가1이 내 집 앞에 와있다. 잠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이해해보려는데 아 그래도 그가 정말 기계는 아니구나 안심하며 나도 모르게 잠금해제 버튼을 누르고 문을 열었다. 그러자 작가1은 기다렸다는 듯이 문 안으로 조심스럽고 또 빠르게 들어오더니 [안녕하세요] 하며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얼굴이 뭔가 이상했는데 그건 뭐랄까 말로 형용하기는 힘들지만 한 사람의 얼굴은 아닌 것 같았다. 또 여자인지 남자인지 아니면 제3의 성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는데 그러고 보니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지조차 모르고 있던 사실에 놀라 [아, 작가님 무슨 일이시죠?]라고 말하는데 그/그녀가 [이번에 보내주신 글 잘 읽었어요. 정말 한 글자로 글을 쓰셨더라고요.]하며 고개를 푹 숙이고는 동작(아니 작동?)을 멈췄다. [아 네... 죄송해요. 그건 근데 작가님이 한번 해보라고 하셔서...] 나는 왠지 모르게 사과를 하며 최대한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그/그녀는 [정말 마음에 들었어요. 이제 때가 된 것 같아요.] 라고 하며 고개를 홱 들더니 얼굴에서 나온 알 수 없는 빛이 번쩍하고 커지더니 나를 집어삼켰다.
[임시보관함 구독자 모집합니다. 월.수.금.토.일. 주 5회. 당신의 메일함으로 재밌는 글을 보내드립니다. 가격은 만 원. 저번 달까지 함께해주신 주차 작가님은 사정이 생겨 더 이상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번 달에는 다시 예훈 작가님이 5일 모두 연재할 예정입니다.]
5
... 눈을 감았다.
지구가 큰 굉음을 내며 폭발했고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으며 그는 고통스러워하고 그녀는 쓰러지고 하늘에서는 붉은 액체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발을 지탱할 땅이 사라지고 의지할 나무가 날아가고 꽃이 흔적도 없이 으스러질 때 비명은 계속되고 날카로운 무언가가 심장을 찌르자 입이 벌어지고 두 다리가 머리 위로 날아갔지만 나는 마치 눈을 뜨는 법을 잊어버린 것처럼 질끈 감고 이 모든 상황을... 아니 어쩌면 눈이 사라진 걸까, 살짝 떠보려 했지만 겁이 나서 어쩌면 내 얼굴이,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던 나를 그나마 대변해주던 자랑스러운 내 얼굴이 이젠 사라져버려서 셀 수 없을 만큼의 긴 시간이 지나고 난 뒤 평생 가본 적 없는 그곳에서야 겨우 발견되는 운명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다가 다시 들려오는 날카로운 비명 속에 파묻혀 어제 아침에 아, 나는 앞으로 뭘 해 먹고 살지, 하던 심각한 걱정이 사실은 정말 아주 지루하고 또 행복한 걱정이었구나라는 걸 깨달았을 때 갑자기 내려오는 따뜻한 빗물에서 풍겨오는 비릿한 향이 내 코를 뚫고 밀려들어 올 때 아직 코는 붙어있나보다, 하고 안심하려는데 느껴지지 않는 허벅지 바깥쪽의 연한 살색 근육 뭉텅이와 둥글고 거친 복숭아뼈, 엄지발가락과 검지발가락 사이의 그 애매한 감촉이, 느껴지지 않아 구역질이 나는 와중에도 어렸을 적 한때 꿈이었던 여행가는 이제 이룰 수가 없겠구나 좌절하며 가진 것 없이도 여행하던 네가 떠올라 어쩌면 이것도 하나의 여행이 아닐까, 하고 헛된 희망을 품어보다가 결국엔 쓴웃음을 지으며... 더는 움직일 수 없는 나를 찾아와줄 사람이 과연 있긴 한 걸까.
눈을 뜨자 우주가 보였다.
무수히 많은 별이 내 눈앞에 있었다.
나 를 찾 아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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